[칼럼]미국도 아닌 필리핀으로 이민을 간다는데
새해 들어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한다. 아마 구정이 들어서이리라. 그러나 이 인사말이 어쩐지 전에 없이 낯설고 어색하기도 하다. 구정에 대한 향수가 흐려져 가기 때문일까? 돌이켜보니 우리 모두가 남의 행복에 대해 마음을 깊이 쓰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 없지 않다. 하긴 그렇다. 광속 같은 이 시대에 가족은 핵처럼 분리되고, 모두 살기 바쁘고, 조금만 방심하면 낙오되는 세상이다. 가족과 친구, 고향도 모르는 사이 멀어져가는 이 시대, 누가 그 물결 막을 수 있으랴. 며칠 전 서울 사는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렇게 속상해 하는 친구의 편지는 처음이다. 남편이 일찍 실직을 했을 때, 아이들이 상위권 대학에 가지 못했을 때, 쌍둥이 딸들이 둘 다 이혼을 했을 때에도 이렇게 마음 아파하는 편지를 쓴 적이 없었다. 이혼하고 혼자되어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쌍둥이 중 하나가 필리핀으로 이민을 결행, 수속을 다 끝내고 떠날 날을 받아 두었다며 애통해 하는 편지였다. 딸 아이 하나 데리고 가진 돈 다 털어 미국도 아닌 필리핀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간다는 게 심히 속상하단다. 말을 꺼내면 의견충돌이 될 것 같아 말도 못하고 있다며 절통해 하고 있었다. 40이 넘은 나이에 노부모를 두고 남편도 없이 떠날 결심을 할 때까지는 그 아이도 보이지 않는 희망에 대해 생각 많이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보통 봉급자로 부부가 자력으로 집을 장만하려면 28년이 걸리고, 독신이 집 장만을 하자면 60년이 걸린다는 통계가 있다. 그것도 한 푼 안 써야 가능하다는 거다. 18세가 된 아이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겠다며 이민대열에 장사진을 이룬다는 얘기를 들은 지도 오래다. 갖고 싶은 국적은 단연 미국으로, 97%가 넘고 그 대상들은 교수나 회계사 자제들이 41%, 상사원 자제들이 40%, 나머지는 모두 공무원의 자제들이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과 인연을 맺을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은 그나마 그 대열에서도 제외되어 제3국으로의 탈출이라도 시도하는 것 같다. 큰 결심을 한 아이에게 용기를 주라고, 안아주고, 등 두드려주고, 손도 잡아주라고, 필리핀에 살다보면 손녀딸이 미국에 와 공부할 기회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위로의 답을 보냈다. 저간 한국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필리핀에서는 한국인들이 범죄의 주대상이라는 것이다. 좀 있어 보여서일까? 관광객이 넘쳐나서일까? 그간 벌써 많은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 친구를 더 낙담하게 했을 것 같아 민망하기 그지없다. 미래학회는 미구에 국가나 정부가 해체되는 때가 오리라는 예언이다. 이민은 각자의 생존권에 속하므로 거주이전의 자유라는 개념의 한계를 넘는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구속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변했다. 미증유의 성장통 속에서도 경제와 더불어 민주주의가 가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젊은 사람들은 좀 더 참고 IT산업의 눈부신 발전에 발맞춰 어서 젊은 두뇌들이 나라를 부하게 만들어 ‘이민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민 오는 나라’로 만들어주기를 바라고 싶다. 모자람 없는 이 부유한 나라에서 조차도, 나의 이민은 어딘가 쓸쓸하기 때문이다.